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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의 제목은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선보였던 〈랜덤 액세스〉에서 유래했다. 혁신적인 예술 실험의 현장이었던 당시 전시의 포스터에는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의 철학적 사유가 녹아있는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가 적혀있다. 이 문구에는 절대적 진리와 기존의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추구했던 그의 철학이 함축되어 있다. 자신의 앎에 대한 이러한 반문은 정형화된 예술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미디어 아트’라는 미지의 영토를 개척해 나갔던 청년 백남준의 예술적 사유와 공명하며,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를 던진다.
참여 작가들은 현대 문명의 이면과 잠재된 가치들을 드러내고, 우리가 규정해 놓은 사고방식과 관행에 의문을 제기한다. 얀투는 물류창고에서 사용되는 자동 운반 차량(AGV)을 활용하여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넘어, 예술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관계를 탐구한다. 김호남은 전 세계 네트워크 시스템의 근간인 해저 광케이블의 동작원리를 가시화하여 기술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려 한다. 또한 한우리는 현대 기술문명의 아이러니를 올드 미디어인 영사기와 신화 등의 서사를 경유하여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복합적인 매체를 활용하여 초현실적인 공간을 조성한 사룻 수파수티벡은 미디어에 의해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왜곡되는 현상을 포착한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기술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작가들도 있다. 정혜선·육성민은 GPS 태그를 장착한 동물을 소재로 한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기술이 공생하는 초연결의 생태계를 탐구한다. 장한나는 자연 속에서 변형된 플라스틱, 즉 '뉴 락'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상호작용하는 관계망으로써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한다. 한편 예술의 형식과 의미를 확장하는 실험도 이어진다. 고요손은 예술 창작의 동반자인 전시기획자 임채은과 아버지 손정호를 작품의 주체로 직접 드러내고, 관람객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면서 조각의 경계를 넓히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참여 작가들의 예술적 역량을 보다 다각도로 조명하기 위해 참여 작가가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전시연계 프로그램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는 정혜선·육성민의 생태 워크숍 〈날개의 배낭: 감각 네트워크〉를 2월 28일, 3월 1일 양일간 운영하여 동물 추적 기술을 통한 종 간의 교감 가능성을 열어본다. 이어서 김호남의 코딩 워크숍 〈연산적 시 워크숍〉이 3월 22일, 3월 29일 2주 연속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며, 참여자들의 결과물이 랜덤 액세스 홀에서 4월 13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더불어 5월 3일부터 24일까지 매주 토요일에는 경기도용인교육지원청과 협력하여 용인미르아이 공유학교를 운영할 예정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전시 참여작가인 고요손, 김호남, 장한나, 한우리 4인이 직접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여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도모한다.
이번 전시는 보이지 않는 경계들을 부드럽게 허물어내고,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와 열린 마음을 일깨우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촉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의 예술정신을 세계와 공유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실험성과 창의성을 인큐베이팅하는 문화예술기관으로서 미래의 백남준을 발굴하는 미션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박종수 기자 0801thebetter@naver.com